1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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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신경정신과 의사라고 한다. 이 책의 첫 시작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글이다. 책에는 자신이 본 임상사례에 관한 글이 몇 있었다. 그 사례들은 볼수록 특이했다.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글을 읽다 보니 책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상대의 얼굴이 형이상학으로 보인다는 것이 무슨 말인 걸까? 일상적인 걸음 속에서 땅에 닿는 내 발이 안 느껴지고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은 도대체 어떨까? 나로서는 상상조차 안 된다. 신경정신과에 관해 일가견이 없는 내게는 이 책이 작가처럼 의학 임상사례에 관한 기록서라기보단, 인식과 존재에 대한 철학서처럼 다가왔다. 현상학이냐 모더니즘이냐 하는 전문 용어들보다는 작가가 본 그대로 써내린 임상사례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 눈 앞의 장면이 모니터처럼 보이는 것이 도대체 뭘까"와 같은 궁금증을 만드는 책이었다. 평소 장애에 관한 관심도, 배경지식도 없었던 나에게 이 책의 내용들이 특이한 경험을 시켜줬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성장하고 적응해나가는 많은 환자들. 그들은 살기 위해 이같이 미칠 듯한 환경에서도 도리가 없었겠지. 적응해나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으니까.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어쩌면 지옥일 수도 있었던 그런 곳이었을 거다. 마냥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다가 막상 그들의 시각에 나를 대입해보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들의 극복에 나는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아닌 영감을 얻었다. 영화 '인셉션'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런 곳에서 스스로를 찾아낸 것은 보고 배울 만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우리가 평범하게 느끼고 인식하는 그 모든 존재들에 대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책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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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아일랜드의 스토니브리지. 스톤하우스와 인생을 함께한 세자매를 이어받아, 치키는 삶의 제 2막을 연다. 제목부터 따듯함이 느껴지는 이 책은 한 번쯤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지루하고 모든 게 맘에 안 들던 치키. 이대로 가다간 보수적인 아버지의 손에 떠밀려 늙은 농부와 결혼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 때, 운명적으로 여행객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치키. 그녀는 고민 끝에 그를 따라 미국행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그 선택은 도박과도 같았고 어머니의 말대로 진짜 사랑이 그리 서둘러 올 리 없었다. 하지만 치키는 부모님과 언니의 압박으로 본인이 원치 않는 삶을 살진 않았다. 본인의 선택으로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를 따라 나섰고, 낭떠러지 끝에서 방황하며 스스로를 감싸려고 거짓말쟁이도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는 스톤하우스의 경영자 치키라는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저는 제 인생이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거든요." "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 하지만 살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도 정리할 건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p75 치키는 한 때 삐끗했으나, 그때를 자신을 다듬는 계기로 삼아 완성된 성인으로 자랐다. 책이 전반적으로 작가 시점이라서, 치키의 속마음을 알기 힘들었다. 그래도 치키가 나무를 바라보던 젊은 여인에서, 숲을 바라보며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멘토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처럼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치키의 친구 눌라의 이야기도 나왔는데, 어쩜 인생이 저렇게 안 풀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들 '리거'가 치키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리거가 '꼴통 그 자체'였던 예전의 모습에서 벗어나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치키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의 어릴 시절을 떠올렸을까? 아마 리거에게 그녀를 잘 챙겨준 캐디시 여사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을 것 같다. 스톤하우스는 지배인부터 숙박객,...

[게으름이 습관이 되기 전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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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라는 습관은 누구에게나 붙어 있는 거머리 같은 존재다. 정말 싫지만, 뗄 수 없는 존재. 나도 게으름이 정말 싫다. 엄마는 항상 나한테 '계획만 번지르르하게 잘 세운다.'고 말한다.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몸과 마음이 합심일체가 되기만 한다면.. 내가 세운 계획들은 손쉽게 풀려나갈텐데. 하지만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이 나한테 비수를 꽂으셨다. 내가 선생님께, "방학이 되니 학원숙제를 자꾸 미루게 돼요. 분명 학원에서는 열정이 불타올랐는데 집에 오면 만사 귀찮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가 공부할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다고 하셨다. 사실 이 책도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주는 책이 아니라 계획세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그러나 모든 건 마음가짐에서 비롯하고, 열정과 의지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 내가 진짜로 무슨 일이든 (학원 숙제든, 독서든, 글쓰기든 뭐든 간에) 할 마음이 있다면 이 책에서 알려준 것처럼 방해 요소를 없애고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휴대폰을 폴더로 바꿀까 고민 중이다. 모두들 게으름 따위에 발목 잡혀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걸 위해 노력하자.

[레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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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은 다언, 해언, 한만우, 상희 등의 인물이 나온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해언, 그녀의 동생인 다언. 해언이 누군가에게 살인을 당해 세상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몇 명의 용의자 이름이 나오고, 그 중 한명인 한만우도 나온다. 한만우의 어리숙한 말투와 답답한 행동에 나 포함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가 실수로 살인했을 거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뭐, 난 읽다 말아서 결말을 모르니까. 만우는 해언을 본 순간 그녀의 착의상태를 말하면서 점점 더 의심받게 된다. 반바지에 반팔? 왜 만우는 그 발언으로 더 의심받았나? 해언이 여성이고, 연약하며 비교적 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영악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정복당하고 사회로부터 강제적인 압박을 받는 게 과연 정당하냐는 질문. 작가는 다언의 입을 빌려 모두에게 묻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속옷을 입지 않은 차림으로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는단 이유로 엄마에게 여러 번 꾸짖음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무심한 아이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런 그녀를 챙긴 것은 다름아닌 동생 다언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은 언니를 잃은 뒤로 송두리째 달라졌다. 온갖 성형시술을 받고, 몸은 어째선지 삐쩍 말라 뼈 뿐이고 남들에게 너무나도 차가웠다. 승희와 다언이 카페에서 대화하는 부분에서 다언의 태도는 그녀의 과거와는 크게 대조되어 보였다. 이사를 간 뒤, 다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치 물 속의 먹물처럼, 하나의 변화는 중심과 연결되어 있는 그 모든 것에 퍼져나간다. 마치 뼛대처럼 자라난 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 어둡게 물들인다. 죽음과 삶, 그 경계. 해언의 죽음 언저리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그 곳에서 어디로도 못 가고 갇혀 있다. 그들의 추락한 인생은 누구 탓을 해야 할까? 그들이 허공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