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우정

우리 발레 학원에서 나와 제일 친한 한수빈은 정말 멋지고 예쁜 발레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정확히 어제 오후에 사라지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저께였다.

"얘, 김민지! 너 오늘 발레 가니?" 수빈이가 뒤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나? 나 오늘 엄마랑 영화 보기로 해서 못 가. 오늘은 다른 친구랑 해." 

"그래, 뭐 다인이랑 하면 되지. 영화 잘 보고 내일 보자!!" 

나는 수업이 끝나고 교문 앞에서 떡볶이를 하나 사먹으며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올해 5학년이 된 후로 수업은 거의 매일 2시 30분에 끝났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들어누워 엄마를 기다렸다.


"띡-띡-띡-띡- 열렸습니다" 
몇 분이나 잤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지 왔니?" 엄마였다. "응, 왔어 엄마. 우리 이제 가자! <Ho Ho Land>, 드디어 보는구나..!"

전부터 보고싶어서 엄마한테 졸랐던 호호랜드였다. 실제로 일어났던 연예인들의 로맨스를 영화로 모티브한 내용이다. 

"도착했다! 와..."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절로 환성이 나왔다. 작은 전광판에는 <호호랜드> 라고 쓰여있었고 그 아래를 보니 사람들이 끝도 없이 서 있었다. 

"엄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 어떻게 봐? 볼 수 있는거야?" 난 약간 불안해져서 엄마께 여쭸다. 
"평소보다 훨씬 많아서 엄마도 좀 놀랐는데 우리가 갈 상영관은 8관, 아이맥스관이라서 괜찮아."

안심하는 숨을 내쉬려고 하는 그 때,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함께 발레학원을 다니고 있는 같은 반 다인이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응 다인아."

"민지 너 왜 안 와? 기다리고 있는데."
다인이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끼리도 친해서 항상 발레학원도 같이 갔었다. 

"나 오늘 영화봐서 못 가. 오늘은 수빈이랑 둘이서 해! 미안...." 

"수빈이? 수빈이가 말 안해줬어? 걔 오늘 모떼월드 갔잖아. 다영이랑, 김지훈이랑 황민석이랑. 아, 그러고 보니 다 네가 싫어하는 애들이잖아. 날라리들! 너한테 숨기려고 그랬나보네."

심장이 철렁 했다. 분명 수빈인 나한테 다인이랑 같이 수업을 듣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다인이가 한 말과 내가 들은 말은 분명 달랐다. 한수빈, 걔가 나를 속인 것이다.

"아, 다인아 영화 시작한다. 끝나고 문자하자!!"
난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영화에 집중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수빈이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내 앞에서는 다영이와 김지훈, 황민석을 욕하고 뒷담화하며 날라리같아서 싫다고 했었단 말이다.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야, 한수빈. 너 오늘 발레학원 갔어?" 한수빈에게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다인아! 내가 한수빈이랑 얘기해볼게. 말해줘서 고마워. 다음주엔 발레 같이가자!!"

다인이를 안심시키려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수빈이에게 답장문자가 왔다.

"왜? 나 오늘 발레학원 간다고 수업끝나고 말했었잖아.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수빈은 내게 거짓말을 했고, 제일 친한 친구를 속였다. 참고 참으며 꾹꾹 눌러둔 화가 폭팔했다.

"거짓말 마. 다인이한테 들었어. 모떼월드 가는 건데 왜 날 속여? 최다영, 김지훈, 황민석이랑 간거 다 알아. 내 앞에선 시키지도 않은 뒷담화를 그렇게 하더니 뒤에서는 너도 똑같은 애였니?" 
마음 속에만 품어 놨던 말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가슴이 먹먹했다.

'수빈이, 내 단짝^^'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우웅- 우웅-" 계속 진동이 울리자 난 폰을 꺼 버렸다. 

다시는, 절대 눈도 마주치지 않을 거다.

-


평소엔 수빈이랑 하던 등교를 오늘은 혼자 한다. 어제 수빈이와 싸운 것 때문에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무서웠다.

"김민지, 일어나. 평소엔 7시만 되도 발딱발딱 일어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느릿느릿하니? 어서 일어나! 또 저번처럼 수빈이랑 만나는 거 늦겠다." 엄마가 소리를 빽 질렀다.

"한수빈이랑 안 만나." 난 목소리를 거의 중저음으로 낮춰 대답했다. 최대한 우울하게.

"뭐? 왜? 싸웠어? 안 싸우더니 왜 싸워? 응?" 엄마가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안 싸웠어! 그만 물어, 엄마!! 나도 프라이버시란 게 있다고." 

엄마가 깜짝 놀라는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체념하고 등을 보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혼자 등교하는 게 낯설었다.
저 멀리서 친한 친구들과 손잡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수빈이가 그리웠다. 정말 좋아하고 믿던 친구, 수빈이였는데...

"김민지!!"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동네방네 들어라 크게 불렀다.
고개를 돌렸는데, 정말.... 마주치기 싫은 대상. 한수빈이었다.

"뭐? 너랑 긴말하기 싫으니까, 할 말만 말해."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수빈에게 날카롭게 잘라 말했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수빈인 말소리가 없었다.

"....."  침묵이 이어졌다.

"야, 너 왜 말 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빈이가 울고 있는 게 보였다.

"흑흑...." 수빈이가 울기 시작했다.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나야. 왜 거짓말 했어..?" 조심스럽게 거짓말 사건을 물어봤다.

"흑....그건 사실...우리 엄마가 다영이 공부 잘하니까 요새 다영이랑 다니라고 부추기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모떼월드 갔어. 가서 걔네 셋만 말하고 난 뒤에서 뒤처져서 걸어가고, 놀이기구도 셋, 셋 나뉘어져 있는 건 나만 따로 타고.......그렇게 된 거였어......민지야, 정말 미안해............말하면 너가 속상할 거란 거 알아서 거짓말했어............미안....."
수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수빈, 말을 했어야지. 내가 그런 걸로 화낸 적이 있냐? 진작 알려줬어야지.......나도 미안."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쿵쿵 소리를 내며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우리는 서로 껴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너희 뭐하냐?" 다인이었다.

"ㄷ...다인아.......!!" 우리는 토끼눈이 되어 다인이를 쳐다보았다.

"화해는 했고 그래? 꼭 붙어서 안고있는 거 보니까 화해는 했나보네." 다인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 우리가 언제 싸웠었나....? 난 기억이 당체 안 나는걸!" 수빈이와 난,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다인이는 어깨동무를 하며 외쳤다!

"달려! 지금 가면 지각인 거 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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