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의 마지막 선물]을 읽고

가람이는 엄마에게 열한 살 생일 선물로 핸드폰을 받았다. 그 핸드폰은 암과 싸우다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가람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담긴 물건이었다. 비록 오래된 고물 핸드폰일지라도 그 속에 담긴 엄마의 모습을 보며 가람은 슬픔을 극복한다. 어린 나이에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존재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작은 소년에게 너무 가혹했다. 실제로 내 주위에는 부모님 중 한 분을 잃은 사람이 드물다. 어쩌면 그들이 숨기는 걸지도 모르지만. 저런 고통을 일찍이 경험한 아이들은 바로 그 당시 느꼈던 슬픔을 다 털어낼 즈음에는 많이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주위의 몇몇 어른스러운 친구들을 보면 자연스레 '어떤 경험을 했길래 이 친구가 이렇게 성숙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하는 친구도 한 명 있었다. 처음 딱 그 애를 봤을 때 든 생각은.. 왜 저러지? 였다. 스스로를 어른스럽다는 타이틀에 맞추기 위해 애쓰려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건 걔에겐 일종의 자기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컸던 사건'에 대한 학교 글쓰기 행사 때문에 우연히 그 애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는데, 걔가 왜 그렇게 까탈스럽고 세상 만사 다 안다는 식으로 행동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솔직히 '공감되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어쨌든 그 글만으로 걔의 정서에 이입하긴 힘들었고 직접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100% 이해하기는 어려운 게 당연하니까. 내 16년 인생에도 참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 어쩔 때 울면서 주위에 내 일에 대해 말해도, (물론 난 그 상대방이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길 바라며 말을 꺼냈음) 대부분 시시껄렁한 반응이었다. 어떨 땐 정말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만 끄덕이며 격렬하게 지루하다는 표현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럿에게 그런 반응을 보게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떤 슬픈, 기쁜, 무서운, 놀라운 ...